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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의 도입 역사

by 그린워커 2025. 9. 30.

국민연금 제도의 도입 논의는 1970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 12월에 법제화가 이루어지면서 완성되었다. 보건사회부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연구실에서 사회보장연금 제도를 체계적으로 분석·연구하였으며, 1971년에 한국개발연구원(KDI)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하였다. 당시에는 두 차례의 경제개발계획이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는 한편, 공업화의 진전·인구의 도시집중과 핵가족화·노령인구의 증가와 같은 사회적 문제가 새롭게 발생하는 시점이었다. 이에 KDI는 1972년부터 시행될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농어촌 지역의 생활 개선, 중화학공업의 육성과 더불어 사회보장의 확충, 근로자의 복지 및 근로환경의 개선을 함께 도모하여 사회·복지 문제도 함께 다루길 원했다.

하지만 사회보장에 대한 청와대의 인식이 문제였다. 1961년 군사정권이 출범할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던 박정희가 내각에 하달한 지시각서에는 '복지국가를 조속히 이룩함은 우리의 궁극의 목표'라고 언급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1961년 「생활보호법」, 1963년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실시하는 등 복지 확충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청와대는 사회보장제도를 '막대한 정부 재정이 소요되는 제도'로 인식하면서 국민연금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팽배해지게 되었다. 국민소득이 겨우 200 ~ 300달러 수준이었고, 기업도 근로자도 보험료를 내기에는 형편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기도 했다. 또한 '가족의 부양은 자식의 몫'이라는 인식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미풍양속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사회적 관행으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청와대의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 KDI는 국민연금 제도가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연금 제도의 잠재적 혜택과 비용을 분석하고, 저축 및 투자 효과를 제시하면서 연금 제도의 도입이 사회적 효과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청와대와 경제기획원은 보건사회부의 협조를 통해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1973년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정년퇴직 근로자와 유족들에게 일정한 연금을 지급하는 사회보장연금 제도를 도입할 준비에 들어갔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보건사회부와 KDI는 보험료의 수준과 징수 방법이나 연금의 수급 요건과 급여 수준 같은 부분 등에서 의견 차이를 보였다. 보건사회부 안은 복지에 중점을 두어 '적게 내가 많이 받은' 구조로 되어있었으나, KDI 안은 저축에 방점을 찍어 상대적으로 '많이 내고 적게 받는' 구조였다. 이후 '선성장 후분배'로 합의가 나온 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최종안이 완성되었다. 최종안에서는 국민복지연금의 도입 목적으로 노령·장애·사망으로 인한 생활의 불안과 위험에 대처하여 근로자가 보다 안정된 자세로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보장된 사회를 조성하며, 연금 제도를 통해 축적된 기금을 생산 투자에 활용하여 국민들의 소득 격차를 줄이고 생활수준의 불균형을 예방하는 것에 있다고 명시하였다.

이후 1973년 12월에 국민복지연금법을 제정한 뒤, 1974년 첫날부터 시행하도록 하였다.[5]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1973년 중동 전쟁으로 인한 유류 파동으로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아 중단되고 만다. 긴급조치를 통해 시행 시기를 늦추다가 1975년 12월에는 시행령으로 시행일을 정할 때까지 무기한 연기함으로써 사실상 실시보류된 것이다. 박정희 정부가 국민복지연금을 도입하고자 한 이유로는 복지의 확충보다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 마련이라는 경제적 목표가 컸다. 국민복지연금법안을 기초할 때에도 '사회보장제도가 소득재분배, 기업의 생산비, 저축 등에 영향을 크게 미치므로 사회경제개발 정책이 큰 틀에서 경제성장과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소득수준이 낮았던 당시로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조차 제대로 조달하기 어려웠다. 국민들의 저축률도 낮았던 상황에서 최소한의 차관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을 강제로 저축시켜서라도 재원을 마련해야 했고, 그 수단으로 국민복지연금이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연금 제도가 중화학공업에 투자할 재원으로써의 역할이 생각만큼 크지 않고, 근로자 재형저축제도 등 국민연금제도를 대신할 다양한 재원조달 대안이 제시되자 국민복지연금의 재시행에 관한 논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제3·4차 경제개발계획도 국민연금기금 없이도 다양한 저축 장려책을 통해 내자동원 체계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면서 논의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1955년부터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이 1980년대부터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주택난이 심화되었는데, 이에 착안하여 주택건설자금에 국민연금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는 방안이 나왔다. 또한 한국에서도 서서히 고령화가 시작되던 시점이기에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성도 있었다. 이후 퇴직금의 조정문제, 기금의 주체와 운용 방법, 소득비례부분의 산정기초·반환일시금의 지급기준 등의 문제를 해결하여 1986년 12월 국민복지연금을 국민연금으로 개편하여 1988년 1월부터 본격적인 시행에 돌입하게 되었다.